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마누엘 칸트 (문단 편집) === 말년 ===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칸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생을 두고 보면, 칸트는 심한 병에는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단 하루도 병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점에 대해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처방한 섭생의 근본 원칙을 따른 자신의 의지의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병을 낫기 위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철학적인 기술이었으며, 생명력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건강상의 관점에서 가능한 한 좋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1)] 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의 나머지 생애 동안 그를 생산적이도록 만드는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린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 정각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 칸트는 물론 허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의 삶의 다음 몇 해 동안 생산적이도록 하는 정신적인 도전에 관계할 많은 시간을 갖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확고한 습관이 된 바 같이, 하인 람페가 매일 아침 5시 15분전에 깨우고 주인이 일어날 때까지 침실에서 기다렸다. 그는 옷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띠를 한 노란색의 침실가운을 걸쳤고 머리에는 나이트캡을 썼는데, 삼각형의 작은 모자를 그 위에 고정시켰다. 그런 후에 연구하는 방으로 가서 두 잔의 온화한 꽃잎 차를 마시고, 점토로 된 파이프에 담배 한 대를 핀다. 다섯 시에 그는 책상에 앉는다. 이제 그는 오전 내내 연구할 시간을 갖는다.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하고 그는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다. 물론 그는 다가오는 학기를 위해 아직도 강의를 알리고 있지만,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있지 않음을 안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46~447)] 칸트는 분명 약하게 태어났다. 그런데도 이토록 장수한 자신의 건강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다.[* 야흐만은 자세하게 주의를 기울여 묘사했다. 즉, 칸트가 자신의 신체적 행위들과 반응들을 고찰하고 높은 나이에 드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신체는 자연으로부터 확실하게 80년이라는 수명을 살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연에게서 삶을 강탈한 셈이었다. 그의 신체의 전체 구조는 그렇게 많은 해를 버티고 유지하기에는 아주 허약했다. 그리고 또한 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신뢰했던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어떻게 흔들리며 느슨한 신체라는 밧줄을 타는 체조기예가가 자신의 균형을 잃지 않는가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음을 확실히 한다. "그리하여 또한 그는 자신의 건강과 많은 나이를 자신의 고유한 업적으로 보았다. 그 스스로 지칭하는 바와 같은 예술품으로서 말이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39~440)] 그러나 40년을 교육에 종사하며 통틀어 268개의 연속강의를 했었고 1796년 7월 23일 마지막으로 강단아래에 서 있는 그의 몸은 더 이상 강의할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 노령의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며,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지지 않았다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떨어져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머리를 가누지 못해 촛불 아래로 머리가 내려가 때떄로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던"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나이트캡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 그는 약해진 몸 때문에 넘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었으나, 몸이 가볍기 때문에 심하게 넘어질 수 없음을 알고 익살을 떨기도 했다. 또한 피로감 때문에 의자에서 잠드는 횟수가 늘어났다. 의자 밑으로 굴러 가끔식 그런 채로 누워 있기도 했다.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때로는 칸트를 아주 태연스럽게 괴롭히던 자그마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침에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면 촛불 아래로 머리를 낮추는데, "무명으로 된 나이트캡에 불이 붙어 머리위에 환한 불꽃이 타올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고 맨손으로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불을 껐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59)]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점점 쇠약하게 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해 보였다. 그러던 1804년 2월 12일 밤에 그는 의식은 있었지만 거의 마비된 듯 보였기 때문에, 말년에 그를 따르며 수발을 도와주던 제자 바지안스키[* 바지안스키(Wasianski)는 칸트의 마지막 생애를 돌보았던 칸트의 학생이자 친구였다. 1801년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집을 떠날 수 없게 되자, 칸트는 바지안스키를 자신의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했다. 바지안스키는 칸트가 죽은 뒤, 칸트의 생애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전기를 썼다.]가 그의 곁을 지켰다. 새벽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짓자, 바지안스키는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돌이켜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것으로 좋다 (Es ist gut)" 라고 속삭였다.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올랐을 때 칸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11시였다.[* 1803년 10월 8일에 칸트는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아팠다. 그의 아버지처럼, 뇌졸중의 발작이 그를 갑자기 땅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물론 그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그러한 타격은 그를 쇠약하게 했으며, 살려는 칸트의 의지가 꺾이게 되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고 거의 무엇인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주변에 잇는 사람을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평온했다. 그의 몸은 거의 해골처럼 수척해졌다. 1804년 2월 그는 죽음의 형상처럼 보였고, 그의 침대에서 종종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었다. 2월 12일 밤에 그는 마비된 듯이 시간을 헛되이 보냈으나 의식이 깨어 있기는 했다. 방에는 바지안스키가 머물고 있었다. 1시경에 칸트가 목마르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지안스키가 그에게 포도주와 물을 섞어 조금 달게 만든 음료를 마시도록 갖다 주었다. 조금 기운을 돋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맛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그에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삶과 노고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불명료하게 들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끔 그는 "그것으로 좋다" 하고 속삭였다. 새벽 4시 무렵, 칸트는 더 이상 바꾸지 않을, 반듯하고 한결같은 상태에 올바르게 누어 있다. 바지안스키는 죽음의 침상 곁에 서 있다. 오전에는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눈은 뜬 채로 딱딱하게 응고되었다. 얼굴을 창백했다. 발과 손은 온기가 없었다.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맥박은 몇 초 동안 뛰다가, 이윽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11시였다. (만프레트 가이어 『칸트 평전』 김광명 옮김, 미다스북스, 2004, p.468)]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가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수천 명이 운구 행렬의 뒤를 따르고 시내의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을 울리는 등 위대한 철학자의 사망을 애도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이 마련한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12077416.jpg|height=280]]}}}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farm9.staticflickr.com/8101449495_acf7a24f1d_z.jpg|height=280]]}}} || ||<-2> {{{-1 (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뒷편의 칸트의 무덤. (우) 기둥 사이로 보이는 칸트의 무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